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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못하는靑春

[기사공유](현장에서 본 노동개혁) 배가 불렀다구요? 눈높이 낮추라구요?

by 불꽃왕꿈틀이 2022. 1. 16.


서울의 한 사립대 국문과 김모(26·여)씨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금껏 50곳이 넘는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한 번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 지난해 하반기 입사지원서를 쓴 25개 대기업 중 20곳은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올해는 눈높이를 낮춰 중견기업 위주로 30여곳에 지원했다. 겨우 서류전형에 통과해 6곳에서 최종 면접까지 갔지만 역시 합격자 명단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김씨는 “기업에서 아무래도 남성이나 어린 지원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서류전형 기준이 좀 더 명확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취업 준비 2년차. 이미 대학 정규 과정은 다 마쳤지만 1년 넘게 졸업을 미루고 있다. 이제는 주변 시선보다 취업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김씨는 요즘 공공기관에서 설문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경력란에 한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고 생활비도 마련할 수 있어서다. 김씨는 “기업에서 신입을 뽑지 않는데 구직자는 점점 쌓여만 간다”며 “정부가 일자리를 늘린다고 하지만 청년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대졸 백수’는 넘쳐나는데 ‘눈높이’에 맞는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 장기 불황에 교육·일자리 정책의 실패가 맞물린 결과다.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청년들은 거대한 취업학원이 된 대학에서 ‘스펙 쌓기’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뒷전이다. 아무데라도 취업에 성공하면 감지덕지라는 마음으로 원서를 써낸다. 하지만 막상 취직이 됐다가 기대치에 못 미쳐 어렵사리 구한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는 일도 부지기수다.

◇“눈높이 낮추란 말이 제일 듣기 싫다”=대학생 유모(26)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취업용 증명사진이다. 정장을 입고 밝게 웃는 사진을 보면서 신입사원이 되는 상상을 한다.


유씨는 지난달 한 중소기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처우와 적성 등을 고려하지 않은 ‘묻지 마 지원’이었다. 합격을 통보한 기업의 초임 연봉은 2800만원. 지금까지 스펙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너무 아까웠다. 지난 2월 졸업 예정이었던 유씨는 졸업을 연기하고 영어학원에 다녔다. 부모에게서 용돈을 받아 월 30만원 수업료를 냈다. 여기에다 이 기업은 유씨가 전혀 관심이 없는 아동복 회사였다. 유씨는 “불안하니까 일단 다 지원한다. 되고 나면 그때부터 나와 맞는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배가 불렀다’는 주변의 쓴소리도 심심찮게 듣는다. 가장 듣기 싫은 건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라고 한다. 유씨는 “남들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그만큼 인정받으려는 게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내년 2월로 졸업을 미루고 다시 입사지원서를 쓰고 있다.

◇‘고시의 늪’ 두렵지만=대전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던 여모(27)씨는 지난해 6월 퇴사했다. 2013년 충남의 한 사립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이 회사에 취직했지만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여씨는 “업무량이나 성과에 비해 그만한 급여를 못 받았다”며 “더 준비해 큰 회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여씨는 회사를 그만둔 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영어학원에서 토익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올 하반기 채용부터 다시 입사지원서를 낼 생각이다. 그는 “대학 전공과 토익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기업에 지원할 수 있는 어학 점수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취업이 ‘바늘구멍’이 되면서 고시생들은 채용시장으로 돌아올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3년째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최모(27)씨는 자신을 ‘실망노동자’라고 했다. 실망노동자는 취업할 의사와 능력은 있으나 직장을 구하지 못해 구직을 단념한 사람을 말한다. 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돼 실업률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최씨는 ‘고시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내년까지만 공인회계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포기하고 취업시장에 나갔다가 취직이 안 돼 다시 돌아온 사람도 많다”며 “고시를 준비하느라 남들 다 있는 스펙도 없다. 시험에 붙지 못하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살릴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지난달 27일 정부는 “청년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라며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 대책’을 발표했다. 2000년 이후 7∼8%에 머무르던 청년실업률은 올 들어 처음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지난 6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10.2%다. 실업률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잠재적 구직자 등 취업 애로계층은 115만명에 이른다.

김판 기자 pan@kmib.co.kr